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제프 전투 (문단 편집) == 결과/영향 == 쌍방 병력 300만명이 넘고, 사상자만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부전선을 중점적으로 다룬 전사 서적을 제외하고는 종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전투이다. 러시아는 21세기에 이른 현재에도 르제프 전투에 관한 문서를 외국인 학자들에게 비공개하고 있다. 르제프 전투의 패장인 주코프 또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고, 단지 [[천왕성 작전]]을 위한 양동 작전이었다는 식으로 서술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전후 기간 내내 르제프 전투의 참전 용사들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지금도 르제프 전투를 중점적으로 다룬 서적은 많지 않다.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의 패퇴 이후 독일의 주공이 중부집단군에서 남부집단군으로 바뀌면서 전사상 남부 전선에만 집중하는 면이 적지 않았으며, 소련 입장에서도 모스크바 공방전처럼 히틀러의 주공이었으며, 전쟁에서 조국을 지켜낸 결정적인 전투가 그득그득한 남부 전선을 더 많이 홍보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하지만 르제프 전역은 1941년에 가혹한 패배를 맛본 독일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분쇄하고, 1943년 중순까지 전선을 굳건히 유지했다는 점에서 매우 그 가치가 높다. 르제프 방어전이 실패했다면 독일군은 1942년에 남부가 아닌 중부에서 돌파구로 밀고 오는 소련군에 대한 저지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전사학자인 [[데이비드 글랜츠]]가 지적했듯이 소련군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중장비와 압도적인 병력, 베테랑 장군들이 대거 포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주코프가 1년에 걸쳐서 패전을 거듭했기 때문에,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르제프 전투는 널리 알려지지 못하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전사학계에서도 재조명되고 있다. 반면 당시 소련군 참전 군인들에게 르제프는 '''르제프 고기분쇄기'''로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악몽 같은 전투였다. 이 표현은 현대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결국 르제프는 2007년, '명예 군사 도시'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르제프에서 위대한 방어를 펼친 업적으로'라는 표현에 르제프 전투의 생존자들과 후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전쟁 당시 독일군 9군 예하 제6보병사단장이었던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이 1962년에 발표한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는 1년 여의 르제프 전투에 관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본 서적에서 그로스만 장군은 서문에서부터 >'''독일군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탁월한 지휘력과 헌신이 방어전의 승리를 이끌었다.''' 고 서술했으며, 본문 또한 사령관으로서의 모델의 지휘를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들소 작전까지 마무리지은 뒤 최종장에 이라는 제목으로 모델의 군 경력 및 르제프에서의 다양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르제프 전투에서 발터 모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